시집 | 기억을 접다
1. 접힌 페이지
헌책장을 넘기다 보면
가끔 귀퉁이가 조그맣게 접혀 있습니다
삼각형으로, 조심스럽게, 말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시간을 붙잡고 있지요
누군가 그 페이지까지 읽다
무언가에 마음이 걸렸던 것일까요
혹은
더는 읽을 수 없어
거기까지라고, 자신에게 말했을까요
나는 멈춘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숨결을 상상합니다
눈이 머문 문장,
심장이 떨린 구절,
침묵 끝에 남긴 표시 하나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그런 접힌 삼각형들을
책임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무심히 넘겼던 페이지도
누군가에겐 다시 돌아가야 할
생의 중요한 한 장이었을 테니까요
나는 종종
지나온 내 삶의 페이지를 되읽습니다
버거운 하루가 끝나고,
잠들기 전 고요해진 마음으로
그날의 말투
그날의 공기
그날의 나를
다시 펼쳐보며
살며시 그 귀퉁이를
한 번 더 접습니다
2. 모월, 모일, 모시
정확한 날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달력의 숫자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도
그날의 표시는 어디에도 없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기억합니다
어느 여름의 습기
처음 불어온 바람의 결
귓가에 스치던 웃음의 높낮이까지
“모월, 모일, 모시”라 적히는 그 자리엔
대체 무엇이 있었던 걸까요
잊고 싶은 일이었는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는지
이제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확실한 건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접힌 자리라는 것
그 마음이
아직도 가만히 나를 부른다는 것
그리움도, 후회도
다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기억이 숫자를 잊는 대신
감정을 남긴 채로 말이지요
3. 두고 온 말
말은
생각보다 자주 놓쳐집니다
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면
입술은 오히려 더 무거워지고
그날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많은 말을 품고 있었지요
잘 지냈냐는 말부터
가지 말라는 말까지
하지만 내 목소리는
너의 발걸음만큼
가볍게 뒤처졌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너는 멀어졌습니다
가끔
밤이 길어질 때면
나는 그때의 말을 꺼내어
속으로 되뇌어봅니다
그때 말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제는 전하지 못할 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끝을 맴돌고 있습니다
말은
말해지지 않아도
마음의 모서리를 남깁니다
4. 말 없는 대답
그날,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나는 묻지 않았고
너는 대답하지 않았어
침묵이 대화보다 진한 날이 있어
말을 덧붙이면
무언가 망가질 것 같은 날
입술보다 눈빛이,
말보다 멈춤이 더 무거운 그런 날
너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고
나는 네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지
우리 둘 다
어떤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
너의 조용한 눈꺼풀에
무너지는 마음이 스며 있었고
내 손끝에 남은 온기가
마지막이었음을
사람은 가끔 말 대신
모든 것을 전하기도 해
침묵은 가장 큰 고백이 되기도 하니까
그날의 우리처럼
말은 없었지만
그 순간이 전부였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답이었지
5. 가슴 속 서랍
마음속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서랍이 하나 있습니다
자물쇠는 없지만
손이 쉽게 가지 않는 그곳
그 안에는
오래전 흘린 눈물의 모양,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의 파편,
혹은
무심코 지나온 순간의 향기가
차곡차곡 접혀 들어 있지요
나도 가끔
그 서랍을 열어봅니다
너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꺼내
그때의 공기,
그때의 숨결을
잠시 되살려보곤 해요
그 서랍을 연다고 해서
당신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 서랍을 닫는다고 해서
당신이 잊히는 것도 아니지요
우리 모두는
이름 없는 마음들을 조심히 접어
서랍 안에 넣고 살아가나 봐요
그 서랍 하나쯤은
누구나 품고 있으니까요
6. 우산 속의 거리
그날은 비가 왔지
조용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여름비
나는 네게 우산을 건넸고
우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어
작은 우산 아래
어깨가 자꾸 부딪혔지
말없이 웃고,
또 말없이 걸었어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우리 사이엔 적막보다 따뜻한 숨결이 흘렀지
나는 그날을 생각하면
항상 그 거리, 그 보도블럭
그리고
그 우산을 떠올려
너와 함께라서
좁은 우산도 괜찮았고
빗소리조차 우리만의 음악 같았어
사람은 왜인지
이별보다 더 오래 기억하는 게
이렇게 별것 아닌 순간들이더라
그래서
그날의 거리, 그 우산
그리고 너의 그림자가
지금도 내 비 오는 날을 찾아오곤 해
7. 시간의 빗장
시간은 언제나 앞을 향해 걷지
멈추지 않고
돌아서지도 않고
나는 종종
되돌리고 싶은 장면이 있어
다시 웃을 수 있다면
다시 잡을 수 있다면
하지만 시간은
그 문에 빗장을 걸어두었더라
손잡이 없는 문
열 수 없는 과거
돌아가고 싶었던 많은 순간들엔
언제나 늦은 후회만 서성였고
그 후회는
다시 시간의 그림자가 되지
사람은 그렇게
열 수 없는 문 앞에서
마음을 놓고 오곤 해
가끔은 생각해
그 문이 열리지 않는 건
우리에게 미래라는 방이 있기 때문일지도
그래서 나는
닫힌 시간 앞에서
눈을 감는 대신
앞을 보려 해
그래도
조금씩
살아가려 해
8. 다시 읽는 마음
사람의 마음도
책처럼 접혀 있다면
어디쯤 다시 펴볼 수 있을까
나는 가끔
지나온 날들을
다시 읽습니다
무심코 넘겼던 장면 속
숨은 마음을 찾기 위해서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마음이 있지요
그 말의 진심,
그 표정의 이유
그 침묵의 무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 마음을
다시 읽습니다
조심히, 조심히
구겨진 감정의 종이를
살며시 펴듯이
다시 읽는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진 않지만
나 자신은
조금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자주 되읽을 거예요
그 마음들을
그 사람들을
그리고
그날의 나를
9. 한 페이지 인생
긴 이야기도
결국은 한 장면으로 남는다는 걸
살아보니 알겠더라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아니라
어떤 문장을 남겼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주니까
우리는 하루하루를
종이에 적듯이 살지
때론 펜을 놓기도 하고
잉크가 번지기도 하지
그래도 그게
우리의 이야기야
완벽하지 않아도
아름답지 않아도
어느 누구의 복사본도 아닌
단 하나의 페이지
너도
나도
그 한 페이지로 살아간다는 걸
기억했으면 해
그리고
그 페이지가
너무 빨리 덮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10. 마음의 귀퉁이
오늘도
나는 내 하루의 마지막에
마음을 살짝 접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그냥 그런 날이었어도
어딘가에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
삼각형처럼 마음의 한 귀퉁이를 접지요
내가 웃은 장면,
조금 울컥했던 말
멍하니 바라본 하늘
다 사라지는 것 같아도
이 마음의 접힘은
어디엔가 남아
나중의 내가 다시 읽게 하겠지요
누군가는 지나쳐버릴 페이지
누군가는 보지 않을 페이지
하지만 나에게는
살아낸 증거로
기억의 책갈피로
오늘도 마음의 귀퉁이를
조용히 접어둡니다
시집 | 기억을 접다 – 완결
이제 이 시집은
한 권의 조용한 마음으로
당신 손에 놓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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